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諸葛孔明兵法書 [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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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전기/회고록 > 기타
작가天道軍略家
출판형태종이책
페이지수 150 Pages
인쇄컬러표지-컬러, 내지-컬러
판형 46판
출판사부크크
ISBN979-11-272-5747-7
출판일2019.01.11
총 상품 금액 20,000

저자 소개

天道軍略家

번역자 소개 (번역서인 경우 입력해주세요.)

목차

諸葛孔明兵法書


次 例



諸葛孔明兵法書
第 二十四 篇
便宜 十六策
將 苑 心 書

諸葛孔明兵法 二十四篇 凡例

治國第一 치국(治國)
君臣第二 군신(君臣)
視聽第三 시청(視聽)
納言第四 납언(納言)
察疑第五 찰의(察疑)
治人第六 치인(治人)
擧措第七 거조(擧措)
考黜第八 고출(考黜)
治軍第九 치군(治君)
賞罰第十 상벌(賞罰)
喜怒第十一 희노(喜怒)
治亂第十二 치란(治亂)
敎令第十三 교령(敎令)
斬斷第十四 참단(斬斷)
思慮第十五 사려(思慮)
陰察第十六 음찰(陰察)

原文 解釋
제1장 諸葛孔明兵法 二十四篇 5
제 2장 便宜 十六策 飜 譯 26
제 3장 將苑 諸葛亮心書 71
제 4장 將苑心書 遍 譯 88
제 5장 諸葛孔明 評傳 142

도서 정보

諸葛孔明兵法書


諸葛孔明兵法 二十四篇 凡例

治國第一 치국(治國)
君臣第二 군신(君臣)
視聽第三 시청(視聽)
納言第四 납언(納言)
察疑第五 찰의(察疑)
治人第六 치인(治人)
擧措第七 거조(擧措)
考黜第八 고출(考黜)
治軍第九 치군(治君)
賞罰第十 상벌(賞罰)
喜怒第十一 희노(喜怒)
治亂第十二 치란(治亂)
敎令第十三 교령(敎令)
斬斷第十四 참단(斬斷)
思慮第十五 사려(思慮)
陰察第十六 음찰(陰察)

原文 解釋


諸葛孔明
AD 181년 8월 20일 ㅡ 234년 10월 8일
本名 諸葛 亮, 字 孔明.


時來天地皆同力 運去英雄不在謀
先帝創業未半而中道崩殂今天下三分
忠臣不離君王側 前無後無諸葛武侯也


중국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정치가 겸 전략가.
자는 공명(孔明), 시호는 충무후(忠武侯)이며, 낭야군 양도현(瑯琊郡 陽都縣;山東省 沂南縣)에서 태어났다. 호족(豪族) 출신이었으나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형주(荊州;湖北省)에서 숙부 제갈현(諸葛玄)의 손에서 자랐다. 후한(後漢) 말의 전란을 피하여 출사(出仕)하지 않았으나 명성이 높아 와룡선생이라 일컬어졌다.
서기 181년 낭야군의 지방관이었던 제갈규(諸葛珪)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親兄은 제갈근(諸葛謹)이고, 친동생은 제갈균(諸葛均)이다. 15세가 되기 전 부친과 모친이 돌아가셔서 한동안 숙부 제갈현(諸葛玄)이 예장에서 제갈량을 돌봤다.
제갈현이 죽자 형주로 이주하였다. 그는 양양(襄陽) 인근의 융중이라는 마을에서 학문(學文)과 농사로 소일했는데, 이 시기에 지었다는 양보음(梁父吟)은 현재까지 전하고 있다. 당시 형주는 전란을 피해 온 명망 높은 문인들이 많았는데, 제갈량은 이들과 활발히 교류하였다. 또 그는 양양 지역의 유명한 문인이였다. 그 결과 20대 중반의 나이에 재야의 현인(賢人)으로 상당한 명성을 얻게 되었다.
유비(劉備)를 도와 오(吳)나라의 손권(孫權)과 연합해 남하하는 조조(曹操)의 대군을 적벽(赤壁)의 싸움에서 대파하고, 형주(荊州)와 익주(益州)를 점령하였다. 221년 한나라의 멸망을 계기로 유비가 제위에 오르자 곧 승상이 되었다.
207년(건안 12) 조조(曹操)에게 쫓겨 형주에 와 있던 유비로부터 '삼고초려(三顧草廬)'의 예로써 초빙되어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진언(進言)했다. 유비는 제갈량을 얻은 것을 바로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水魚之交]에 비유하였다.
이듬해 오나라의 손권(孫權)을 설득하여 유비와 연합하게 하여, 적벽의 싸움에서 조조의 대군을 물리쳤다. 소설인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는 신기묘산(神機妙算)으로 조조의 대군을 격파하는 데 결정적 공을 세운 것으로 묘사되지만, 역사서인《삼국지(三國志)》에는 별다른 활약상을 찾아볼 수 없으며, 형주와 익주 등 강남을 손에 넣은 유비가 제갈량을 군사중랑장(軍師中郎將)으로 삼아 영릉(零陵)·계양(桂陽)·장사(長沙) 등 3군(郡)을 감독케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세간에 구전하는 제갈량의 초인적 지략은 대부분 소설《삼국지연의》에서 기인하지만, 유비의 신임을 받아 중용된 것은 소설과 역사서의 기록이 일치한다. 214년(건안 16) 유비는 성도(成都)를 평정하고 나서 그를 군사장군(軍師將軍)으로 삼아 자신이 출병한 뒤 군량과 병사를 대도록 하였고, 촉한의 황제에 오른 뒤에는 그를 승상(丞相)으로 삼았으며, 죽음을 앞두고는 자신이 다 이루지 못한 대업을 꼭 이루도록 당부하였다.
유비는 제갈량에게 자신의 아들 유선(劉禪)을 보좌하되, 아들이 무능하면 몰아내고 황제의 자리를 취하여도 좋다고 유언하였으나 제갈량은 끝까지 후주(後主) 유선을 보필하였다. 재차 오나라와 연합하여 위나라와 항쟁하였으며, 생산을 장려하여 민치(民治)를 꾀하고, 윈난[雲南]으로 진출하여 개발을 도모하는 등 촉한의 경영에 힘썼다.
그러나 상승하는 위나라에 비하여 국력의 열세가 뚜렷한 가운데 오장원(五丈原)에서 위나라의 사마의(司馬懿)와 대치하다가 병이 들어 사망하였다. 위나라와 싸우기 위하여 출진할 때 올린《전출사표(前出師表)》와 《후출사표(後出師表)》는 이를 읽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는 충신이 아니라고 할 정도로 충정으로 가득한 천고의 명문으로 꼽힌다. 후인들이 중국 곳곳에 제갈무후사(諸葛武侯祠)를 지어 그의 충절을 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