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머리말 / 믿음과 길 표지판 5
1. 바로 그 교회에 가고 싶다(행2:42-47) 9
2. 갈등은 성숙하게 만든다(엡4:32, 빌2:1-4) 21
3. 기도하는 모습이 희망입니다(약5:16) 33
4. 인정받는 좋은 교회의 모습(살전1:1-4) 41
5. “살고 싶으냐, 야웨를 찾으라”(암5:1-6) 53
6.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73
7. 브리스길라와 아굴라(행18:1-11) 83
8. 약속대로 오신 임마누엘 하나님(사7:14) 101
9. 한 사람을 위해(눅1:1-4) 115
10. 하나님을 아는 두 가지 방법(시19:1-14) 125
11. ‘이처럼’ 사랑하시는 하나님(요3:16) 137
12.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잠27:21) 151
13. 힘을 빼고 기다린 후 부르는 새 노래(시40:1-3) 163
14. 하나님의 초청장(사1:18-20) 177
15. 그리스도를 모범으로 삼는 목자(요10:11-15) 195
16. 인생 시계는 ‘하마르티아’ 시계(약4:14) 211
17.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전7:14) 227
18. 그리스도의 친필 편지(고후3:1-3) 241
(여적) 설교는 인문학이다 253
1. 바로 그 교회에 가고 싶다(행2:42-47) 9
2. 갈등은 성숙하게 만든다(엡4:32, 빌2:1-4) 21
3. 기도하는 모습이 희망입니다(약5:16) 33
4. 인정받는 좋은 교회의 모습(살전1:1-4) 41
5. “살고 싶으냐, 야웨를 찾으라”(암5:1-6) 53
6.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73
7. 브리스길라와 아굴라(행18:1-11) 83
8. 약속대로 오신 임마누엘 하나님(사7:14) 101
9. 한 사람을 위해(눅1:1-4) 115
10. 하나님을 아는 두 가지 방법(시19:1-14) 125
11. ‘이처럼’ 사랑하시는 하나님(요3:16) 137
12.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잠27:21) 151
13. 힘을 빼고 기다린 후 부르는 새 노래(시40:1-3) 163
14. 하나님의 초청장(사1:18-20) 177
15. 그리스도를 모범으로 삼는 목자(요10:11-15) 195
16. 인생 시계는 ‘하마르티아’ 시계(약4:14) 211
17.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전7:14) 227
18. 그리스도의 친필 편지(고후3:1-3) 241
(여적) 설교는 인문학이다 253
도서 정보
설교는 인문학이다
지금 유튜브에는 설교 상(床)에 말씀들이 가득히 차려져 있다. 그러나 ‘아무 말 대잔치’ 상 같다. 어느 것이 진국(원조)인지 분간이 안 간다.
사이비들은 오만가지 첨가물로 맛을 왜곡시켜 괭이질을 일삼고, 기독교의 탈을 쓴 무당들은 잡탕을 끓여낸다. 현대 설교가 막국수처럼 ‘막’ 대접을 받는 원인이 되고 있다.
SF 소설 같은 거대한 하이테크 도시에 살지만, 오히려 고독과 단절감을 느끼며 절망, 즉 ‘죽음에 이르는 병(키에르케골)’을 앓고 있는 이들에게 보내는 설교는 어떠해야 할까?
인생사 담긴 인문학(人文學)을 더해 보자. 인간의 본성을 일깨워 하나님을 보게 하자. 그러기 위해서 설교자는 먼저 인문학적 요소를 배워야 한다.
춘천에 있는 모 교회 목사는, 꼭 설교 첫머리를 매주 읽은 책 한 권을 예화로 덧입힌다. 설교자들도 인문학적 수준이 독서량, 출판 등 작가로서의 수준까지 올라가야 한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 신학이 필요하듯, 회중(인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문학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성도들은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고 고민을 나누길 원한다. 이때 인문학은 좋은 도구가 된다. 소설, 시, 예술, 철학, 역사, 영화 등에는 다양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교회에서 성경만 가르치려 하면 성도들은 내밀한 이야기를 전부 숨겨 버린다.
20세기 신학의 거장 칼 바르트는 “한 손엔 성경, 다른 한 손엔 신문을”이라고 말했다. 복음이 시대 정신과 만나야 한다는 외침이다.
급변하는 세상에 적응을 완료하여, 이에 익숙한 교인들에게 보내는 설교가, 성경 내에서만 맴돌고 타 종교의 설법, 강론보다 못해서야 되겠는가.
그러니 인문학을 신앙과 별개인 듯 여기지 말고, 설교에 인문학적 요소를 곁들여 맛깔 나는 설교로 회중들의 영혼의 살을 찌워보자.(*)
지금 유튜브에는 설교 상(床)에 말씀들이 가득히 차려져 있다. 그러나 ‘아무 말 대잔치’ 상 같다. 어느 것이 진국(원조)인지 분간이 안 간다.
사이비들은 오만가지 첨가물로 맛을 왜곡시켜 괭이질을 일삼고, 기독교의 탈을 쓴 무당들은 잡탕을 끓여낸다. 현대 설교가 막국수처럼 ‘막’ 대접을 받는 원인이 되고 있다.
SF 소설 같은 거대한 하이테크 도시에 살지만, 오히려 고독과 단절감을 느끼며 절망, 즉 ‘죽음에 이르는 병(키에르케골)’을 앓고 있는 이들에게 보내는 설교는 어떠해야 할까?
인생사 담긴 인문학(人文學)을 더해 보자. 인간의 본성을 일깨워 하나님을 보게 하자. 그러기 위해서 설교자는 먼저 인문학적 요소를 배워야 한다.
춘천에 있는 모 교회 목사는, 꼭 설교 첫머리를 매주 읽은 책 한 권을 예화로 덧입힌다. 설교자들도 인문학적 수준이 독서량, 출판 등 작가로서의 수준까지 올라가야 한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 신학이 필요하듯, 회중(인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문학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성도들은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고 고민을 나누길 원한다. 이때 인문학은 좋은 도구가 된다. 소설, 시, 예술, 철학, 역사, 영화 등에는 다양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교회에서 성경만 가르치려 하면 성도들은 내밀한 이야기를 전부 숨겨 버린다.
20세기 신학의 거장 칼 바르트는 “한 손엔 성경, 다른 한 손엔 신문을”이라고 말했다. 복음이 시대 정신과 만나야 한다는 외침이다.
급변하는 세상에 적응을 완료하여, 이에 익숙한 교인들에게 보내는 설교가, 성경 내에서만 맴돌고 타 종교의 설법, 강론보다 못해서야 되겠는가.
그러니 인문학을 신앙과 별개인 듯 여기지 말고, 설교에 인문학적 요소를 곁들여 맛깔 나는 설교로 회중들의 영혼의 살을 찌워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