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잠깐! 비회원구입을 원하시나요?!
  • 부크크의 회원가입은 다른 곳의 비회원 구매보다 간단합니다.

회원가입

오후 4시, 저 만치 바라 볼 수 있는 시간

1개

|

후기 0

  • 배송일 : 영업일 기준 2-8일 내로 배송됩니다.
  • 환불규정 : 주문 후 인쇄되므로 배송이 준비된 후에는 환불이 불가능합니다
분야시·에세이 > 에세이
작가오창훈
출판형태종이책
페이지수 328 Pages
인쇄컬러표지-컬러, 내지-흑백
판형 A5
출판사부크크
ISBN 979-11-5811-050-5
출판일2015.02.12
총 상품 금액 17,000

미리보기

간송미술관 가는 길

그럭저럭 올해로 7년이 되었던가? 나는 ‘답사’라는 명목으로 수강생들과 어울려 서울 주변의 역사 현장을 찾아 다녔다. 제도권 밖의 교육현장인 고시학원이지만, 대학 재학생 및 졸업생을 대상으로 강의한다는 점에서 대리 만족하고 있다. 수업 도중에 툭 던진 한 마디에 학생들의 요청이 있었고, 가볍게 시작했던 아차산성 답사에 매우 흡족해 하기에 매년 이때 쯤 되면 자리를 마련하곤 한다.
올해는 최순우 옛집, 간송 미술관, 수연산장, 심우장에 이르는 성북동 길을 걸었고, 서울 성곽을 넘어 삼청동, 북촌 한옥마을을 따라 안국동으로 내려오는 길을 함께 했다.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삼선교)에서 만나 버스 두 정거장 거리를 걷다 보면 최순우 옛집이 나온다. 혜곡 최순우(1916~1984)는 국립 중앙 박물관장을 지낸 고고학자로 그야말로 책보고 집필하고 강의하는 선비의 전형이었다. 한국 문화재에 대한 깊은 애정과 뛰어난 안목으로 그 아름다움을 찾고 보존하는 데 일생을 바쳤던 이 분의 미학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책이 바로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이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16년 동안 거주하셨던 주택을 시민문화유산 제1호로 보존하고 4월에서 11월까지 일반인에게 무료로 개방하고 문화예술 교육프로그램과 특별 전시회를 개최하고 있다. 내셔널 트러스트 운동은 시민들의 자발적인 모금, 기부, 증여를 통해 보존가치가 있는 자연과 문화유산을 확보하기 시민 주도로 영구히 보전, 관리하는 시민운동이다. 재단법인 내셔널 트러스트에서 연구원으로 있는 강 선생에게 미리 전화를 걸어 안내를 부탁했다.
트인 기억(ㄱ)자, 트인 니은(ㄴ)자 형태의 집 구조와 서재, 집필 공간, 안방, 따님 방을 일일이 소개해 주었고, 풍경 마냥 지붕 처마 끝에 달린 방울은 스위스 여행 도중에 목장에서 구입하여 간송과 하나씩 나눠 가진 것이라고도 하였다. 집필실 툇마루에 앉아 뒷마당을 바라보았다. 눈앞에 청죽(靑竹)이 자라고 그 가운데에는 별 특징도 없을 것 같은 달 항아리 백자가 놓여 있었다. 몇 그루의 나무들이 배치되어 있는 특별할 것이 없는 정원에서 우리 문화는 “기교를 부리지 않고 화려하지 않다.”고 한 최순우 선생님의 글을 새삼스럽게 떠올리게 되었다.
버스로 한 정거장 거리를 걸어 성북초등학교 길로 접어들면 간송 미술관이 있다. 간송 전형필은 일제 강점기에 대부호로 엄청난 양의 국보급 서적, 서화, 자기, 불상 등을 사들여 일본으로 우리의 귀중한 문화재가 반출되는 것을 막은 인물이다.
10만석 지기 집안에서 유복하게 자라난 전형필은 민족대표 33인 중 한사람이자 당대 최고의 서예가였던 위당 오세창 선생을 만난 뒤 문화재 보는 안목과 지식을 배운다. 이후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민족 문화 유산의 보호임을 자각한 전형필은 자신의 전 재산을 바쳐 일본으로 유출되는 우리 문화유산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당시 서울의 고급 기와집 한 채 값이 1,000원이었다고 한다. 청자 기린형 향로, 청자 오리형 연적, 청자 상감 포도문 매병, 청자 상감 국목단 당초문 모자합 등 영국인 콜렉터 존 개즈비(John Gadsby)가 가지고 있던 청자(靑磁) 10여 점은 기와집 50채, 국보 70호로 지정된 『훈민정음(訓民正音)』원본은 기와집 10채에 해당하는 거금을 주고 구입했고, 심사정의 대작 <촉잔도권(蜀棧圖卷)>은 기와집 5채 값에 구입하고 수리비만 6채 값에 해당되는 금액이 들었다.
1936년 지금의 미술관 건물인 보화각(保華閣)을 지어 보관해왔고, 1960년대 이후 고미술품과 전적을 정리하여 1971년 이후 매년 봄·가을 2회에 걸친 수장품 전시회와 함께 논문집 『간송문화(澗松文華)』를 발간하고 있다. 이전에는 오원 장승업, 겸재 정선, 추사 김정희 등 한 사람을 집중하여 그 시대와 제자 등의 작품들을 전시하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보화각 설립 70주년 기념 조선 서화전>이라고 하여 조선왕조 각 시기를 대표하는 작품들을 전시하여 서예, 회화의 변천사를 알 수 있도록 했다.
조선 전기 안평대군과 한호의 글씨, 조선 중기의 사임당 신씨의 <초충도>, 황집중의 <포도도>, 신위의 대나무 그림을 비롯해 조속의 <까치도>로 이어진다. 조선 남종화를 확립한 현재 심사정, 진경산수화를 꽃피운 겸재 정선, 조선 회화를 절정에 올린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 감동이 느껴지는 추사 김정희의 글씨 등 그야말로 한국사 교과서에 실려 있는 작품들을 직접 대할 수가 있었다. 또한 짐승의 터럭 한 올 한 올을 사실적으로 그려 ‘변닭’, ‘변고양이’라고 불렸던 변상벽, 나비 그리기가 장기라 해서 ‘남나비’ 라고 불린 남계우의 희귀작, 추사의 애제자로 요절한 전기의 작품도 있었다. 나란히 전시되어 있는 헤경궁 홍씨의 궁체와 이산 정조의 글씨 등을 직접 보면서 같이 갔던 우리 젊은 친구들의 표정을 보니 분명 눈이 휘둥그레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간송미술관은 도시 한복판에 있다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주위가 한적하고 조용하다. 4,000여 평 대지 위에 지어진 보화각과 출입이 제한된 주택 뿐 정원에는 나무와 꽃들이 무성하다. 돌보지 않은 나무들 사이에 아무렇게나 서 있는 석등이나 미소 짓고 있는 마애불들도 결코 미술적 가치가 범상치가 않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이곳을 개방하는 기간을 은근히 기다리게 되었고, 사람들이 뜸한 평일 오후 녘에 와서 전시회를 둘러보고 가족이나 친구들과 오랫동안 울창한 나무 아래 앉아 있곤 하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오전에 일정을 잡았음에도 전시장 안에는 많은 사람들로 인해 혼잡하였다. 1시간 정도의 관람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입구부터 골목길까지 긴 행렬이 이어져 있더라. 무슨 영문인가 했더니 요즈음 혜원 신윤복을 소재로 한 TV 드라마가 방영되기 때문이다. 하긴 <미인도(美人圖)>, <월하정인(月下情人)>, <선유도(船遊圖)> 등 신윤복의 그림 앞에 유난히도 사람들이 모여 있었던 게 기억났다.
국보로 지정된 것만 10점 등 간송 미술관은 국립 중앙박물관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가치 있는 문화재를 엄청나게 보유하고 있다. 간송 전형필이 수집한 문화재의 경제적 가치는 이미 수천 억 원을 넘는다고 한다. 모든 게 민족의 자산이고, 우리에게도 이런 조상이
있다는 게 자랑스럽지 않은가 말이다. 문득 이런 귀한 자료를 보존하고 무료로 개방하여 여러 사람의 눈을 맑게 씻어주는 간송 전형필 선생님에게 마냥 고맙고, 또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대적인 광고에 이끌려 10,000원 이상의 입장료를 지불하고 들어 가 보면, 2점 정도의 원작만 있을 뿐 모사품만 잔뜩 진열해 놓은 전시회도 우리 주변에 많지 않던가.
고인의 뜻을 받들어 후손들이 무료로 개방한다고 하지만, 이제는 변화를 시도할 시점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상설전시관을 새로이 짓고 당당하게 입장료를 징수하여 관심 있는 사람들이 늘 찾을 수 있고, 입장료를 비용 일부로 처리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되지 않을지 모르겠다. 어쩌면 이제는 허술해진 장소에 엄청난 보물 덩어리를 보관하고 있다는 것도 그렇고, 소리 소문 없이 알려지기 시작하여 밀려드는 인파를 목격하면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들깨 수제비로 간단히 점심을 먹고 만해 한용운이 말년에 거처하였던 북향집 심우장으로 향하였다. 가는 도중에는 소설가 이태준이 살던 집을 보존하여 전통차를 팔고 있는 <수연산장>이 있었는데, “다음 기회에 사귀고 있는 애인하고들 가거라.” 하면서 지나쳤다.
성북동 마을버스 종점에서 가파른 골목길로 50m정도를 걸어 올라서 소나무 한 그루가 유난히 푸른 집이 심우장이다. 성북동이라고 하면 엄청난 부자들이 산다고들 알고 있다. 하지만 성북동도 동네 나름이지 길 하나 건너에는 겨울이면 미끄러워 골목마다 연탄재를 뿌리는, 아직도 서울 시내에 이런 곳이 있을까 싶을 정도의 달동네가 이 지역이다.
만해 한용운은 종교인 이전에 강직한 성격을 가진 실천하는 지식인이었다. 금강산 건봉사에서 대중공양 도중 한․일 병합조약 소식을 들은 만해는 승려들이 공양을 계속하자 “이 중놈들아, 밥이 넘어가느냐?”며 밥상을 걷어차 버렸다. 또 3·1운동을 주도했던 그는 감옥에서 일부 민족대표들이 사형당할 것을 두려워하자 “목숨이 그토록 아까우냐?”면서 똥통을 뒤엎기도 했다.
그토록 가까웠던 최린, 최남선, 이광수 등에 대해서도 ‘친일파’라고 상종하지도 않았던 건 물론이고, 3·1운동으로 3년을 감옥에서 지낸 뒤 출옥한 직후 찾아온 기자에게 만해는 “지옥에서 쾌락을 즐겼노라.”고 말했다. 총독부를 향하기 싫다며 북향으로 지어 북풍 눈보라를 자처한 심우장에는 만해의 미소 띤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질곡과 대립으로 점철된 한국 근현대사의 많은 종교인들은 이 같은 개인적인 수난과 은혜에 의해 친일 또는 친미, 반공 등의 노선을 계속하였다. 오늘날에도 그러한 양상은 크게 다르지 않다. ‘재테크’, ‘성공’, ‘출세’라는 단어로 그럴듯하게 포장된 양지 녘 중생을 보고 호통 칠 것 같은 만해의 모습이 새삼스럽게 다가오는 듯 했다. 골목길을 계속 올라 그러한 중생들이 모여 살고 있는 도시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서울 성곽으로 향했다.